[민병두의 K-Sapience]① IT강국을 만든 빨리빨리, 이제는 성장판 닫는 부작용

인사이드 / 박남숙 기자 / 2024-06-24 07:28:48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은 대한민국 기자 출신 정치인으로 문화일보 워싱턴특파원, 정치부장 등을 거쳤다. 이후 제17·19·20대 국회의원으로 정무위원장, 민주당 대통령후보 총괄특보단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민병두 원장의 ‘K-Sapience’는 전세계인이 열광하는 우리 문화(Korea Culture)에 대해 본인의 경험이나 통찰, 지식 등을 녹여 재해석해 바라본다. [편집자주]

(사진=연합뉴스)
 

[알파경제=박남숙 기자] "나는 그제야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래 위의 궁궐 같게만 느껴지던 대기업은 점점 번창하기만 했고, 거기 남아 있던 동료들은 계장으로 과장으로 올라가 반짝반짝 윤기가 돌았다. 어떤 동창은 부동산에 손을 대 벌써 건물 임대료만으로 골프장을 드나들고 있었고. 오퍼상인가 뭔가 하는 구멍가게를 열었던 친구는 용도가 가늠 안 가는 어떤 상품으로 떼돈을 움켜 거들먹거렸다. 군인이 된 줄 알았던 동창이 난데없이 중앙 부처의 괜찮은 직급에 앉아 있었으며, 재수마저 실패해 따라지 대학으로 낙착을 보았던 녀석은 어물쩍 미국 박사가 되어 제법 교수 티를 냈다. 나는 급했다. 그때 이미 내 관심은 그런 성공의 마뜩지 못한 과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회 구조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과일 쪽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이문열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작품 속의 시간은 1959년-1960년-1987년으로 이어지는데 부정부패가 심했던 이승만 정부 말기에서, 압축성장을 거쳐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는 198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작중의 이 독백은 우리 사회에서 빨리빨리 문화가 형성된 시대의 자화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지 않으면 크게 낙오할 것 같은 사회적 심리와 이를 부추기는 상황은 이 시대의 지배 환경이었고 중심 정서였다.

일각에서는 그 뿌리가 우리 민족의 DNA라며 역사적 연원을 찾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빨리빨리에 젖어 들었을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여러 역사서와 고서를 뒤져서 조선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부지런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몇 명의 사가들이 남긴 간단한 인상기를 갖고 우리 민족성을 그려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은 흥이 많다, 음주가무를 즐긴다, 포악하다 등 너무 단편적이다. 그래서 비교적 상세하게 인상기를 쓴 최근세사의 기록부터 살펴볼 수밖에 없다.

구한말 네 차례(1894~1897) 조선을 방문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 살림출판사, 집문당》이라는 책을 남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한마디로 게으르고 느리다고 인상기를 남겼다.

“한양은 단조롭고 더럽고 죽은 도시다. 사람들은 게으르고 무기력하다. 한양의 산들이 가진 황토색은 진흙벽, 초가지붕, 진흙탕 도로의 색깔과 똑같다. 단색의 도시에 오직 검은색과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때묻은 흰옷을 입고 무언가를 운반하는 짐꾼들, 빈민가 귀퉁이에서 삶을 흘려보내고 있는 활기 없고 더러운 아이들, 고기토막에 힘없이 꼬리를 흔들고 있는 다갈색 개들…”

느려터지고 타성에 젖었고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는 외국인의 인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904년에 3개월간 조선에 체류했던 사회주의자 잭 런던은 《전쟁속의 코리아》에서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중에서도 의지와 진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장 비능률적인 민족”이라고 까지 했다.

당시 조선은 모든 것이 문제점 투성이라서 조선인을 보면 쏘아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까지 했다.

일본인이 남긴 인상에는 증오와 편견이 가득 차 있다. “조선인은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민족이다” “조선의 유일한 생산품이 똥, 담배, 이(흡혈 곤충), 기생, 호랑이, 돼지, 파리 뿐이다”고 오키타 긴조는 《이면의 한국》(1905)에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글을 썼다.  

 

(사진=연합뉴스)


아리랑으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정신은 무관심과 무저항, 은둔과 무사안일이라고 했다.

외국인들이 본 조선 후기의 인상기가 편협한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망해가는 조선에서 희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계층 상승의 꿈이 사라진 나라에서 죽어라고 일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않게 되어 있다.

반대로 가능성이 보이면,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빠른 속도로 계층 상승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사람들은 빨리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서부로 서부로, 골드러쉬가 생긴 것처럼. 반대로 희망이 없으면 사회주의 협동농장의 농민처럼 되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영주와 지주에게 수탈을 당하여 자기 수확이 미미하기 때문에 민중들이 부지런할 이유가 없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부르주아 계급이 생겨나면서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조건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선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가릴 것 없이 농경사회에서 농민들의 생활 양태는 비슷했다. 마지못해 일하거나, 저항을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조선에 대한 인상기를 쓴 외국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자기 나라의 봉건시대의 마지막을 목도했더라면 똑같이 희망이 없어 나태해질 수밖에 없는 조상을 발견했을 것이다.

“한국은 개혁에도 불구하고 단지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계급, 그리고 인구의 4/5인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인 평민계급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조선조 말에는 희망이 없었다. 5백년 왕조는 무능하고 양반계급은 무위도식으로 일생을 보내고 민중은 동학농민전쟁 같은 민란과 혁명운동에 동참하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다. 이런 계급 구조가 아니었다면 조선인의 근면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을 것이다.

당시 동서양의 시간관념이 달랐던 것도 편견을 갖게 했다. 조선은 아직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었고 산업화 이전 단계였다. 농경사회의 시간 개념은 순환적이다.

중국에서 예로부터 연월일을 표기하는데 사용했던 12간지나, 조선시대 말에 정착했던 5일장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동양의 농경 사회에서는 시간은 미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고 생각을 했다.

농경사회 아시아 농민의 시간 감각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돌고 도는 것처럼 시간도 돌고 도는 것일 뿐이었다.

순환적 시간의식은 불교의 윤회사상, 유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맥이 닿아 있다(한국역사연구회《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황병주《근대적 시간의 등장》>.

일직선적인 시간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10년 후, 20년 후, 미래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지향적인 개념이 부재했다.

5년 단위로 국가경제계획을 세운다든지, 10년 이내에 달에 사람을 쏘아 올리겠다(미국 케네디 대통령) 등의 시간 개념은 근대국가, 그것도 최근세사인 현대국가에 들어와서 가능해졌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을 하고서야 근대화의 시간표를 만들었다. 미군정 하에서 한국 사람들이 시간개념이 없고 약속에 늦는다고 해서 코리안타임(korean Time)이라는 말이 나왔고 일부에서는 이것이 한국인이 게으른 징표라고 하는데 이치에 닿지 않는 얘기다.

성숙한 산업사회를 경험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전국적 전세계적으로 분초를 다투는 시간 개념이 정립되어 있었고, 농경사회에 머물렀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는 예외없이 시간 개념의 지체가 있었다.

이것은 부지런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산업사회의 시간관과 농경사회의 시간관의 차이다. “시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가시화한 것인데 근대적 시간이 가장 먼저 작동하고 시계를 발명한 스위스에서는 '시간이 금'이었고 그 같은 생각은 유럽에 퍼져나갔지만, 비서구권에서 시간관은 이전 시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황병주).

이런 제약 요인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은 원래 부지런하고 성실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는 얘기다. 조선의 주식은 쌀이다. 쌀은 원래 아열대 기후에서 재배가 가능하다. 38도선에 위치한 임진강까지 쌀의 북방한계선을 끌어 올린 것이 우리 민족이다.


(사진=연합뉴스)


비가 부족하고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서는 쌀의 경작이 어렵다. 물을 끌어들여야 하고, 농사일에 88번이나 손이 간다.

그래서 한자에 논 농사를 짓는 답(畓)에 물 수(水)가 들어가 있으며, 한자 쌀(米)에 여덟 팔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 있다.

이런 기후 한계를 가진 곳에서는 부지런하지 않고서 쌀농사를 할 수가 없다. 몬순기후 지대에서 벼 농사를 짓고 사는 농경민족으로서는 부지런함이 필수 요소다.

어느 시한까지 모를 내지 못하면 폐농이요, 어느 시한까지 초벌 김을 매지 않으면 벼보다 잡초가 성해 버린다.

한국인은 긴박하게 살아가게끔 체질화되어 있다. 해가 떠서 해가 지는 동안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기에 해가 뜨는 새벽 시간부터 일했다. 오후에는 날씨가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때문에 아침이 빠르다. 아침을 잘 먹어야 했다. 빠른 속도의 식사 습관도 만들어졌다.

조선조 말에 연변에서 우리 민족이 쌀농사에 성공했다. 북방한계선인 임진강까지 쌀농사 지대를 확장한 것도 대단한데 북위 41도선인 만주 지역까지 오직 부지런함과 개척 정신으로 경작 지대를 넓혔다.

양반 계급의 수탈이 없는 지역이라는 점도 동인이 됐다. 북위 51도선에서 건앙법(볍씨 단계에서 발효시킨 돼지 오줌에서 얻은 비료를 투입) 쌀 농사에 성공할 정도로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민족이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강제 이주한 중앙아시아에서도 쌀농사에 성공했다. 미국 이민의 역사에서도 그같은 부지런함은 입증된다. 당시 유대인이 주류를 이루었던 채소 야채 과일상과 경쟁했다. 다른 야채상이 새벽 6시에 문을 열면 한국에서 이민 온 야채상은 새벽 4시에 문을 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이 부지런하다는 징표는 많다. 하지만 부지런하다는 것과 빨리빨리 한다는 것은 성격이 다른 얘기다.

이어서 일제 강점기가 왔다. 구한말 계급제도가 폐지된데 이어서 일제는 기존 계급을 해체했다. 그리고 새로이 줄을 세웠다. 그들이 세운 줄은 역동성을 가질 수 없었다.

3.1만세운동이 있고 난 후 수립된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에 따르면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 자로 관리를 삼고, 친일 지식인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양성한다. 친일 분자를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케 한다”(이선민 《1919년 일제 문화정치》/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에서 재인용)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사진=연합뉴스)

따라서 계층 이동은 거의 없었고 친일파를 등용하기 위한 좁은 문만 있었다. 식민지 체제에서 고급 관료인 고등관, 즉 주임관 이상의 직급에 일본인이 1943년에 86.4%(조선인 516명)이였다. 즉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조선인의 역동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개념의 입신양명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용어인 출세로 대체된디. 조국을 잃어버렸기에 대의명분인 명예는 사라지고 세속적 성공으로서의 출세만이 남았다.

이런 세속적 풍토하에서 미군정이 들어서서 다시 줄을 세웠다. 친일파가 맨앞에 줄을 섰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통역관과 미국 유학파가 새로이 득세했다. 인생은 줄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한국전쟁은 ‘평등한 가난‘을 선물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와해가 되어 경쟁의 출발점이 같아졌다는 점에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면 역동적인 사회, 건전한 시장경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알파경제 박남숙 기자(parkns@alpha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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