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선위 심의 전 결론 공표로 금융감독체계 원칙 훼손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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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진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2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알파경제=김종효 기자]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삼성생명 회계 처리 논란과 관련, 최종 결정 권한이 없음에도 "방향을 잡았다"고 언급해 파문이 일고 있다. 자신의 범위를 넘어선 '월권 행위(越權行爲)'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의 조사가 끝나기도 전 사실상 결론을 공표한 것으로, 이는 감독기구의 수장이 심의·의결 기구인 증권선물위원회의 고유 권한을 침해한 것 아니냐는 비판 일색이다.
이 원장은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열린 보험회사 CEO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국제회계기준(IFRS)에 맞춰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금감원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금감원은 조사·검사 업무만 담당하는 집행기관일 뿐, 삼성생명 회계 처리에 대한 최종 결정 권한은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에 있다.
이 때문에 이 원장의 발언은 법적 권한이나 행사능력도 없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 선 넘은 이찬진 금감원, '허수아비' 된 증선위
금융감독체계상 금감원과 증선위, 금융위원회의 역할은 명확히 구분된다.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감원은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업무를 수행하는 집행기구다.
반면 기업회계 기준 및 감리에 관한 업무의 최종 심의·의결 권한은 증선위가 갖고 있으며, 금융위는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최고 정책결정 기구다.
이런 권력 분점 구조는 조사를 담당하는 집행기구와 최종 판단을 내린 심의기구 간 견제와 균형을 위해 설계됐다.
이찬진 원장은 금감원의 조사가 끝나 해당 안건이 증선위에 상정되기도 전 언론을 통해 사실상 결론을 공표하면서 논란을 자초했다.
한치호 경제평론가 겸 행정학박사는 "금감원은 조사하고 건의하는 기관일 뿐"이라며 "실제 결정은 증선위에서 내리는데 원장이 마치 기정사실인 양 방향성을 예단해 발언한 것은 명백한 월권"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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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진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2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모두발언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 대통령 동기·참여연대 출신…'중립성' 시험대 오른 이찬진
이번 월권 발언이 더욱 논란이 되는 것은 이찬진 원장의 과거 이력 때문이다.
그는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시절부터 삼성의 회계 이슈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에도 "부당한 합병비율로 이재용 부회장이 3조6천억원의 부당 이득을 봤다"며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런 배경을 볼 때 그가 금융감독기구의 중립적 수장이 아닌 시민단체 활동가 시절의 개인적 신념을 바탕으로 예단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 원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에서 변호인을 맡은 인물이다.
금융감독 실무 경험이 없는 채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임명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그의 발언이 감독기구의 중립성과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한치호 박사는 "이런 금감원장 행보는 경제부총리나 금융위원장의 권한까지 침범한 월권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면서 "삼성생명법 관련 이슈는 증선위 권한"이라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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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현 전 금융감독원장. (사진=연합뉴스) |
◇ 이복현·김기식 그리고 이찬진…금감원장의 '입', 왜 반복되나
이찬진 원장의 월권 발언은 과거 금감원장들이 반복해온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복현 전 금감원장도 재임 중 과도한 언론 노출과 월권 논란으로 지속적인 비판을 받았다.
그는 32개월여 임기 동안 기자 간담회, 백브리핑을 92차례 하며 "금융 당국의 입" 역할을 자처했지만, 금융위 패싱 논란과 월권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김기식 전 원장 역시 참여연대 출신으로 취임 15일 만에 사임한 바 있다. 그는 외유성 해외출장 논란과 함께 피감기관을 대상으로 한 교육 사업을 벌이며 중립성 시비에 휘말렸다.
이는 금감원장이라는 자리가 법적 권한을 넘어 시장과 여론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구조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대규 전대규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금감원장은 차관급이라서 인사청문회가 필요없다"면서 "언제부터인가 금감원장에 인사청문 통과가 어려운 대통령 최측근이 선임되는 경향을 보이는 동시에 초법적 경제수장 행세를 하는 자리로 변질됐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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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삼성생명) |
◇ 이찬진 원장 말 한마디에…'8.9조' 삼성생명 미래 안갯속
금감원장의 '의견'이 마치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알려지면서 삼성생명을 비롯한 금융 시장에 불필요한 혼란과 불확실성이 야기되고 있다.
삼성생명 올해 2분기 말 계약자지분조정 규모는 8조9458억원에 달하며, 이 방식이 변경될 경우 삼성생명은 자본 축소와 K-ICS 비율 하락, 배당 축소 압박 등 재무구조 전반에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김혜경 법무법인 여정 변호사는 "증선위 위원들은 이제 금감원이 제시한 결론을 추인하든지, 아니면 '재벌 봐주기'라는 여론 압박을 감수하고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월권적 발언이 감독기구의 신뢰성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금감원은 감독 '집행' 기구로서 중립적으로 사실을 조사하고 보고해야 하는데, 원장이 시민단체 시절의 개인적 신념을 바탕으로 예단을 갖고 접근한다면 금융감독의 공정성과 중립성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대체의 시선이다.
알파경제 김종효 기자(kei1000@alphabi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