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현 기자
wtcloud83@alphabiz.co.kr | 2025-03-12 08:26:35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정부가 반도체와 이차전지, AI 등 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산업은행에 50조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기금 조성을 추진한다.
그러나 정작 산업은행은 핵심 인력 대량 이탈과 취약한 재무구조, 부실한 대출 관리로 내홍에 빠져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평가다.
◇ '본점 부산 이전' 파고에 무너진 인적 인프라
현 정부 출범과 함께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이 국정과제로 추진되면서 산업은행은 심각한 인력 유출 문제에 직면했다.
강석훈 회장 취임(2022년 6월) 이후 작년까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핵심 인력(4·5급)을 포함해 230명 이상의 직원이 산업은행을 떠났다.
이러한 인력 이탈의 주된 원인은 본점 부산 이전 추진에 따른 불안감이다.
2022년 상반기 14명이던 중도퇴직자 수는 윤석열 정부가 '산업은행 부산 이전'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킨 2022년 하반기에 43명으로 급증했다.
2022년과 2023년 산업은행 퇴사자는 각각 97명과 87명으로 직전 연도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었다.
특히 퇴사자 중 근무 경력 5~10년차에 해당하는 4급과 5급 실무진 비중이 62%에 달했다. 이들은 산업은행이 첨단산업을 지원하는 데 필수적인 전문성을 갖춘 핵심 인력이다.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을 위해서는 본점 위치를 '서울특별시'로 둔다는 한국산업은행법 제4조 1항 개정이 필요하지만, 탄핵 정국 속에서 법안 개정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2025년 1월 산업은행은 신년 조직개편에서 부산 이전 관련 추가 부서 신설이나 인력 확대를 단행하지 않았으며, 강석훈 회장의 신년사에서도 전년과 달리 '부산·울산·경남'에 대한 언급이 없어 사실상 이전 계획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실질적 이전 효과를 위해 핵심 부서를 부산으로 옮기는 등 대규모 조직개편으로 본점에서 일하던 직원 84명이 부산과 광주 등으로 근무지를 이동한 상태다.
이로 인한 본점 업무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
◇ '정부 배당 압박'에 짓눌린 재무구조
산업은행은 첨단산업 지원을 위한 금융 역량 강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오히려 정부의 과도한 배당 요구로 인해 재무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3년 산업은행은 역대 최대인 8781억원을 정부에 배당했다.
이는 전년 대비 433.2% 급증한 규모로, 정부가 올해 출자기관으로부터 받은 전체 배당금액(2조1322억원)의 41%에 해당한다. 배당성향(35.43%)도 금융지주 평균(27.12%)보다 크게 높았다.
강석훈 회장은 지난 6월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안정적인 금융지원 여력 확보를 위해 배당 유보를 통한 자체적인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은이 독일의 정책금융기관인 KfW처럼 정부에 배당을 하지 않고 순이익을 내부에 유보하게 된다면 현금증자와 동일한 효과를 내면서 장기적으로 매년 3조원 이상의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기반이 될 수 있다"며 "3년 정도 배당을 유보하면 약 1조5000억원 자본금이 늘어 15조원의 대출 여력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당 유보 건의는 정부의 세수 부족과 다른 공공기관과의 형평성 문제 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더욱이 산업은행의 재무구조는 한국전력공사와 HMM 등 자회사의 실적 변동성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다.
2021년 2조4618억원이었던 당기순이익은 2022년 4650억원으로 급감했다가 2023년 다시 2조5089억원으로 회복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산은의 이벤트성 손익변동에 따라 BIS 비율이 널뛰기하는 동안 정부는 계속해서 현물을 주고 현금을 받아 가는 기이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지난 3년(2021~2023년)간 정부에 낸 배당금 1조8759억원을 유보했거나 배당성향을 낮췄다면 그만큼 현금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고 대출 여력도 높아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부실 대출 관리로 신뢰도 추락…국책은행 역할 의문
산업은행의 부실한 대출 관리도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감사원 감사를 통해 부실 대출로 수백억 원 손실이 난 사실이 드러났다. 또 중견기업의 허위 이사회 의사록과 주주 명부를 통한 대출 사기 사건도 발생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회사 측이 이 사실을 알린 후에도 산업은행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산업은행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은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KDB 신성장 4.0 지원자금' 대출상품의 참여기업 257개 중 63개사가 최근 5년간 공정위의 제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30개사는 2회에서 최대 16회까지 지속적으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확인됐다.
산업은행은 이번 첨단전략산업기금 조성 이전에도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금융지원 역할을 해왔다.
강석훈 회장은 지난해 6월 산업은행 자체적으로 100조원 규모의 리바운드 프로그램을 통해 첨단전략산업에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산업은행이 처한 인력난과 재무구조 약화, 부실한 대출 관리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야심찬 계획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일각에서는 첨단산업 위기 극복의 선봉장 역할을 맡은 산업은행이 정작 스스로의 위기는 극복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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