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현 기자
wtcloud83@alphabiz.co.kr | 2025-12-30 08:28:44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쿠팡이 3370만 명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총 1조6850억 원 규모의 보상안을 내놨다. 액면가로만 보면 국내 유통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다.
그러나 보상안의 이면에는 현금이 아닌 '4종 쪼개기 쿠폰'이라는 맹점이 존재한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조치가 진정한 피해 보상이라기보다, 자사 플랫폼에 고객을 묶어두는 '락인 전략'이자 신사업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 프로모션에 가깝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쿠팡은 개인정보 유출 통지를 받은 3370만 명에게 1인당 5만 원 상당의 구매이용권을 내년 1월 15일부터 지급한다고 29일 밝혔다.
대상에는 와우회원과 일반회원은 물론, 이미 탈퇴한 고객까지 포함된다.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대표는 "고객을 위한 책임감 있는 조치"라고 강조했으나, 세부 내역을 살펴보면 실상은 다르다.
피해 보상의 표준으로 통하는 현금 지급이 아닌, 오직 쿠팡 앱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조건부 이용권이기 때문이다.
◇ 5만 원 아닌 5천 원…'조건부 쪼개기' 쿠폰
가장 큰 문제는 보상안이 4종의 쿠폰으로 쪼개진 구조라는 점이다. ▲쿠팡 전 상품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 원 ▲알럭스(명품 뷰티) 2만 원으로 구성된다.
이 중 별다른 제약 없이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5000원이 전부다. 나머지 4만 5000원은 소비자의 추가 지출을 유도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우선 쿠팡이츠 쿠폰 사용을 위해서는 별도의 앱 설치가 필수적이다. 배달비 3000~4000원을 제하고 나면 소비자가 체감하는 실질 할인 폭은 1000~2000원에 불과하다.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쿠폰 역시 진입 장벽이 높다. 여행 상품은 기본 단가가 수십만 원대이며, 알럭스는 SK-II, 에스티로더 등 고가 명품 화장품 전용관이다.
2만 원의 할인을 받기 위해서는 적게는 5만 원에서 많게는 10만 원 이상의 사비를 지출해야 하는 셈이다.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가 보상을 받기 위해 가해 기업의 매출을 올려줘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를 두고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보상이 아닌 강제 소비"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특히 일명 '탈팡(쿠팡 탈퇴)' 행렬에 동참했던 이탈 고객의 경우, 쿠폰을 쓰기 위해 다시 가입해야 한다.
쿠팡 고객센터 측은 "탈퇴 회원은 재가입 시 이용권을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신뢰를 잃어 떠난 고객에게 재가입을 종용하는 모순적인 구조에 대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진정성 없는 마케팅 상술"이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주를 이룬다.
◇ 미국선 징벌적 배상, 한국선 쿠폰으로
쿠팡의 대응 방식은 한국과 미국에서 극명한 온도 차를 보인다. 미국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집단소송에 직면했지만, 한국에서는 쿠폰으로 무마하려 한다.
법무법인 대륜은 미국 뉴욕 연방법원에 쿠팡 본사를 상대로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미국은 중대한 과실이 인정되면 천문학적 배상 판결이 나온다.
실제로 2021년 T-Mobile은 7660만 명 정보 유출로 합의금 3억5000만 달러(약 5100억 원)를 현금으로 지급했다. 피해자들은 손해 규모에 따라 최대 2만 5000달러(약 3300만 원)까지 배상받았다.
반면 한국의 사법 현실은 기업에 관대하다. 2012년 네이트·싸이월드 해킹 사건, 2016년 인터파크 사건 등에서 대법원은 기업 책임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했다.
인터파크 사건에서 법원이 인정한 1인당 배상액은 10만 원이었다. 쿠팡의 5만 원 쿠폰은 이보다도 적다.
쿠팡은 한국의 약한 법규를 이용해 헐값 합의를 유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 소송 리스크를 방어하려는 전략이라는 평가다.
김국일 대륜 경영대표는 "미국 사법시스템의 강력한 칼날로 진상을 규명하고 실질적 배상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 소비자의 데이터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이른바 데이터판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 김범석 의장, '계산된 타이밍' 의혹
보상안 발표 시점에 대한 의구심도 증폭되고 있다. 쿠팡이 보상안을 공개한 29일은 국회 6개 상임위 연석 청문회가 열리기 바로 하루 전이다.
정치권과 업계에서는 청문회 하루 전 '1조 6850억 원'이라는 거액의 보상안을 발표함으로써 여론을 환기하고 청문회의 예봉을 꺾으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고 있다.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지난 28일, 사태 발생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미흡했던 초기 대응에 대해 사과한다"는 입장을 냈으나, 정작 청문회에는 "해외 거주 및 기존 일정"을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지난 17일 청문회와 국정감사에 이은 연속 불참이다.
최민희 국회 과방위원장은 이를 두고 "대한민국 국회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에서 매출의 90% 이상을 올리면서도, 책임지는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는 행태가 진정성 논란을 키우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태 초기 김 의장이 직접 나서 사과했다면 여론이 이 정도로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정부의 민관합동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자체 조사를 근거로 피해 규모를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겹쳐, 쿠팡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앞서 쿠팡은 지난 25일 유출 규모가 3000명에 불과하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기습 발표했다. 그러나 과기정통부는 "민관합동조사단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다"며 즉각 반박했다.
정부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일방적 발표로 피해 규모를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쿠팡의 모든 대응이 여론 무마와 법적 책임 최소화에 맞춰져 있다.
소비자단체들은 조건 없는 현금 배상과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실질적 도입을 요구한다. 쿠팡 사태는 플랫폼 독점 기업의 도덕적 해이와 한국 법규의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1조 6850억 원이라는 숫자는 화려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공허하다. 현금이 아닌 쿠폰, 보상을 가장한 마케팅, 책임이 아닌 회피. 쿠팡이 내놓은 이번 대책은 진정한 사과가 아닌 철저히 계산된 '리스크 관리 전략'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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