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현 기자
wtcloud83@alphabiz.co.kr | 2025-12-24 08:28:19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2026년 상반기부터 우체국 창구에서 시중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금융위원회가 '금융 접근성 제고'를 명분으로 우체국 은행대리업을 승인했지만, 이는 오히려 시중은행들의 지방 점포 폐쇄를 가속화하는 '철수 명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과기정통부 소속인 우체국이 금융 업무를 수행함에도 금융감독원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지 않아, 금융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과기정통부·금융위 감독 권한 '이원화'의 구조적 한계
금융위원회는 17일 정례회의를 통해 4대 시중은행과 우정사업본부, 9개 저축은행의 은행대리업 서비스를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했다.
이르면 2026년 상반기 전국 20여개 총괄우체국에서 시중은행 대출 상담과 신청서 접수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제도 설계 단계부터 구조적 한계가 지적된다. 우체국은 과기정통부 소속 정부기관으로 금융감독원의 피감사 기관이 아니다. 금융감독원은 우정사업본부의 요청이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검사할 수 있을 뿐, 상시 감독이나 강제 제재 권한은 없다.
실제로 2013년 법 개정 이후 과기정통부 요청으로 금감원이 우체국 금융을 검사한 사례는 단 한 차례에 불과하다. 즉, 우체국 창구에서 대출 불완전 판매가 발생하더라도 금융당국이 현장 조사를 하거나 직원을 징계할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우체국 직원은 국가공무원법 또는 별정우체국법의 적용을 받기에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따른 제재권 밖에 있다. 은행이 금융감독원의 엄격한 내부통제 기준을 적용받는 반면, 우체국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자체 규정만 따르는 실정이다.
동일한 대출 상품을 판매함에도 채널에 따라 규제 강도가 달라지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될 우려가 있다.
금융위는 "손해배상 책임은 은행에 귀속한다"고 밝혔지만, 이는 사후 조치일 뿐 근본적인 사전 예방 메커니즘은 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금융 감독의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국가기관인 우체국의 시스템 오류나 직원 과실에 대해 민간 은행이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 "대체 수단 있다"…은행들, 지방 점포 폐쇄 가속화되나
우체국 은행대리업은 시중은행에 지방 점포 축소를 위한 확실한 '구실'을 제공한다.
국내 은행 영업점의 감소세는 이미 뚜렷하다. 은행 영업점은 2019년 말 6738개에서 2020년 말 6427개, 2021년 말 6121개로 꾸준히 줄어들었다.
이어 2022년 말에는 5831개로 6000개 선이 무너졌고, 2023년 말 5747개를 거쳐 지난해 10월 말 기준 5690개까지 쪼그라들었다. 불과 5년여 만에 1000개가 넘는 점포가 사라진 셈이다.
금융당국은 2023년 은행 점포 폐쇄 시 사전영향평가를 강화하고 대체 수단 마련을 의무화했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점포를 폐쇄하면 지역 주민이 금융 서비스를 받을 곳이 없다"는 비판 때문에 폐쇄 속도를 조절해왔다.
그러나 우체국 대리업은 이러한 방어막을 무력화할 수 있다. 은행들은 이제 "수익성 악화에 따른 지점 폐쇄가 불가피하며, 인근 우체국을 대체 수단으로 활용해 소비자 불편을 최소화했다"는 논리를 펼칠 수 있게 됐다. 금융당국 역시 "대체 수단이 존재한다"며 점포 폐쇄를 승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지방은행들은 더욱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이들은 시중은행 대비 부족한 브랜드 파워를 '지역 밀착형 영업망'으로 상쇄해왔지만, 전국 2500여 개 우체국이 4대 시중은행의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하면 지방은행의 유일한 경쟁 우위마저 무너진다.
지역 자금이 우체국 창구를 통해 서울 본점의 시중은행으로 쏠리는 '자금 역외 유출' 현상 심화도 예견된다.
◇ 우체국 IT 시스템·인력 전문성 '의문 부호'
운영 역량에 대한 우려도 여전하다. 우체국 창구 직원은 우편, 택배, 보험, 예금 등 방대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순환 보직 공무원이거나 별정우체국 직원인 경우가 많다.
수년간 여신 심사 교육을 받은 전문 은행원이 상주하는 시중은행 지점과 달리, 우체국에서는 복잡한 대출 상품 구조나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를 전문적으로 상담하기에 한계가 있다.
우체국 금융의 IT 시스템 안정성 역시 꾸준히 도마 위에 올랐다. 2023년 차세대 금융 시스템 도입 직후 78시간 동안 전자금융거래 장애가 발생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자금관리서비스(CMS) 시스템 오류로 잔액 없는 계좌에서 입금이 처리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지난 9월에는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우체국 전산 시스템이 마비되며 계좌 조회 및 입출금 업무가 사실상 중단되기도 했다. 이처럼 잦은 전산 장애는 우체국의 IT 내부통제가 시중은행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방증한다.
은행대리업은 시중은행의 코어 뱅킹 시스템과 우체국 전산망을 실시간으로 연동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적 안정성을 요한다. 데이터 전송 과정에서 누락이나 지연이 발생할 경우 책임 소재 규명이 난해해질 수 있다.
금융위는 은행대리업이 점포 축소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대리업 운영을 이유로 인근 영업점을 폐쇄하는 행위"를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를 우회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지적한다. 시간차를 두고 점포를 폐쇄하거나, '수익성 악화'를 주된 사유로 내세우면 제재가 어렵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디지털 취약계층의 금융 접근성 제고를 내세우지만, 정작 감독 체계와 전문성 확보 방안은 미흡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우체국 대리업이 시중은행의 비용 절감 수단으로 전락하고, 지방 금융 인프라 붕괴를 제도적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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