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현 기자
wtcloud83@alphabiz.co.kr | 2025-05-13 08:17:57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SK텔레콤이 유심(USIM) 해킹 사태 발생 24일 만인 12일부터 '유심 재설정' 서비스를 도입했다.
실물 유심 카드 교체 없이도 해킹 위험을 차단할 수 있는 방안이지만, 해킹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위약금 면제 결정은 "법률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되며 3주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위약금 면제 여부 결정을 6월 말로 미루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 유심 재설정…물량 부족 해결될까
12일부터 전국 T월드 매장에서 시작된 '유심 재설정' 서비스는 실물 유심 교체 없이 내부 정보만 변경해 해킹된 유심 정보를 무력화하는 방식이다.
SK텔레콤은 통신사 전산상에서 해당 고객의 가입자식별번호(IMSI)를 무작위 값으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이는 유심 교체와 동일한 보안 효과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SK텔레콤 관계자에 따르면 "아이디(IMSI)가 교체되면 비밀번호(K)가 유출되더라도 해당 정보는 무용지물이 된다"며 "유심 재설정은 유심 교체와 동일한 보안 효과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이 기술의 유효성은 이동통신 기술 연구 단체인 6G 포럼, 오픈 랜 인더스트리 얼라이언스(ORIA)의 확인을 받았다고 SK텔레콤 측은 설명했다.
앞서 SK텔레콤은 유심 교체 희망 고객을 위해 5월 말까지 500만개, 6월 말까지 추가 500만개 등 총 1000만개의 유심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실제 유심 교체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 브리핑에 따르면 현재까지 유심 교체를 완료한 고객은 143만명, 유심 교체 예약자는 722만명에 달해 물량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다.
임봉호 SK텔레콤 MNO사업부장은 "이번주부터 일평균 25만~30만명 정도가 유심 교체를 받을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는 유심 재고가 부족해서 교체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유심 재설정'에도 뚜렷한 한계가 있다.
이 서비스는 유심 교체 예약 순서가 돌아온 가입자만 T월드 매장에 직접 방문해서 받을 수 있어, 결국 대기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매장 방문은 필수인 만큼 현재 유심 교체를 기다리는 722만명의 가입자들에게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 위약금 면제 '끝없는 검토'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해지 위약금 면제 문제는 SK텔레콤과 정부 모두 결정을 미루며 시간을 끌고 있다.
SK텔레콤 이용약관 제44조 1항 4호에 따르면 '회사의 귀책사유로 인해 계약이 해지될 경우 위약금을 면제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SK텔레콤은 여전히 "법률적 검토 중"이라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SK텔레콤이 가입 약관에서 '회사의 귀책 사유로 인해 고객의 계약을 해지할 경우' 위약금 납부 의무를 면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번 해킹사태가 SK텔레콤 귀책 사유로 인한 서비스 문제라면 이 조항을 근거로 위약금을 면제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2016년 삼성전자 갤럭시노트7 발화 사태 당시 통신 3사가 자발적으로 위약금을 면제했던 사례도 있다.
그러나 유영상 SK텔레콤 대표는 위약금 면제가 현실화할 경우 "한 달 기준 최대 500만명까지 이탈할 수 있다"며 "그럴 경우 위약금과 매출까지 고려하면 3년간 7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위약금 면제 비용은 연간 2조3000억원 정도로, SK텔레콤의 올해 예상 영업이익 1조9820억원과 맞먹는 규모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9일 "위약금 면제 여부를 6월 말쯤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간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6월 말에 공개될 예정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유 장관은 “이번 문제를 일으킨 건 해커라는 점에서 SK텔레콤도 굉장한 피해자인데, 어쨌건 고객을 방어할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언급해 소비자 단체와 정치권에서는 정부가 소비자 보호보다 기업 편들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 집단소송 가입자 급증…소비자 권익 찾기 본격화
SK텔레콤이 위약금 면제를 주저하는 이유는 단순한 경제적 손실을 넘어 통신 시장 내 지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영상 대표가 우려한 "500만명 이탈"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경우, SK텔레콤은 국내 이동통신 시장 1위 사업자 자리까지 내줄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한다.
지난 2월 기준 SK텔레콤의 이동통신(MNO) 가입 회선 수는 2309만9839개다. 만약 500만 이용자가 이탈하면 회선 수는 약 1800만개까지 감소하게 된다.
이 중 절반이 2위 사업자인 KT로 이동할 경우, KT의 회선 수는 현재 1334만9784개에서 약 1600만개까지 증가할 수 있다. 사태 이후 일일 번호 이동 동향을 보면 KT가 LG유플러스보다 더 많은 이탈자를 흡수하고 있어, 통신 시장 지각변동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위약금 면제가 법적 책임 인정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법조계에서는 '회사의 귀책사유'를 인정하게 되면 그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미 다수 법무법인과 시민단체들이 SK텔레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하고 있어, 위약금 면제는 더 큰 법적 책임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실제로 '유심 해킹 피해자들 집단소송 카페'는 가입자가 8만명을 돌파했고, 로피드법률사무소의 하희봉 대표변호사는 지난달 30일 SK텔레콤을 상대로 50만원의 위자료 지급을 청구하는 지급명령 신청서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법무법인 로집사 역시 SK텔레콤 가입자 4명과 함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정엽 로집사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채권을 매수해서라도 SK텔레콤을 상대로 집단 소송과 같은 대규모 소송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민단체들의 고발도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최태원 SK 회장과 유영상 SK텔레콤 대표를 개인정보보호법 및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
또한 법무법인 대륜 소속 변호사들은 5월 1일 유영상 대표와 SK텔레콤 보안책임자를 업무상 배임 및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사고 발생 19일 만인 지난 7일 대국민 사과를 했으나, 위약금 면제 문제에 대해서는 "이용자 형평성 문제와 법적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며 "SKT 이사회가 논의 중이고 좋은 해결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SK텔레콤은 현재 2500만명에 달하는 가입자(알뜰폰 포함)의 보호를 위해 유심보호서비스 확대와 유심 교체, 유심 재설정 등 다양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소비자의 근본적인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위약금 면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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