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현 기자
wtcloud83@alphabiz.co.kr | 2025-08-15 08:00:42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펄어비스의 기대작 '붉은사막'이 여섯 번째 출시 연기를 발표한 13일 시장의 반응은 참혹했다.
주가는 하루 만에 24.17% 폭락하며 시가총액 수천억 원이 증발했고, 분노한 주주들은 급기야 "주주를 기만하는 코스닥 상장사 경영진에 대한 특검 촉구" 국민청원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7년이라는 긴 개발 기간 동안 반복된 약속 파기는 단순한 일정 지연을 넘어 기업 신뢰성에 치명적 균열을 냈다.
2019년 첫 공개 이후 코로나19, 완성도 제고, 파트너사 협업 등으로 바뀌어온 연기 사유들 이면에는 게임의 근본적 품질 문제가 숨어 있다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 하루 만에 증발한 수천억, 분노의 국민청원
13일 펄어비스 2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허진영 대표가 "올해 4분기 출시 일정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며 2026년 1분기로의 추가 연기를 발표하자 시장은 즉각 등을 돌렸다.
주가는 개장과 동시에 급락세를 보이며 2만9650원으로 마감했다. 전날 종가 3만9100원 대비 24.17% 하락한 수치다. 올해 최고가 4만6150원과 비교하면 35% 넘게 떨어진 것이다.
증권가의 반응은 더욱 냉혹했다. 안재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컨퍼런스 콜에서 "내년 1분기 출시를 믿어도 되는지 궁금하다"며 경영진의 신뢰성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주주들의 분노는 법적 책임 추궁으로까지 번졌다.
한 투자자는 국민청원에서 "펄어비스는 5년째 분기마다 주주를 기만하고 거짓말로 신작을 지연시키고 있다"며 "대한민국 주식시장은 주주를 기만해도 아무도 처벌하지 않는 썩어빠진 시장"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개별 기업의 경영 실패가 사회적 신뢰 문제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 "개발 마무리 단계"…7년간 여섯번 연기
붉은사막의 출시 연기를 되짚어보면 처음엔 이해할 만했던 사유들이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는 패턴이 뚜렷하다.
2018년 개발 시작 이후 최초 2021년 4분기 출시를 목표로 했던 붉은사막은 2026년 1분기까지 총 6차례 연기됐다.
2020년 '더 게임 어워드'에서 2021년 겨울 출시를 예고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이유로 2022년으로 첫 연기됐다. 당시만 해도 시장의 이해가 있었다.
그러나 2022년과 2023년을 거치며 출시 일정은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경영진은 분기별로 "개발이 마무리 단계"라고 반복했지만 구체적인 일정은 계속 뒤로 밀렸다.
이후 2023년 말 2025년 4분기 출시를 재확정하며 글로벌 게임쇼 참가 등 대대적인 마케팅을 재개했다.
가장 치명적인 여섯 번째 연기의 공식 사유는 "보이스 오버 작업, 콘솔 인증, 파트너사와의 협업 스케줄 조정"이었다.
하지만 이는 AAA급 게임 개발 막바지에 당연히 예측해야 할 표준 절차들이다. 출시를 불과 몇 달 앞두고 이런 이유로 분기 단위 연기를 발표하는 것은 프로젝트 관리의 심각한 허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외부 요인(코로나19)에서 내부 요인(완성도)으로, 다시 후반 공정(파트너 협업)으로 바뀌어온 연기 사유는 개발 현장의 혼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이미 붉은사막이 아닌 '신기루사막'이라는 혹평까지 나오고 있다. 사막에서 보이는 신기루처럼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라지는 게임이라는 뜻이다.
한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7년째 개발 중이라더니 이제 진짜 신기루가 됐다"는 조롱 섞인 댓글이 수많은 공감을 받기도 했다.
◇ '조작감 불편' 개선 할 수 있을까
펄어비스가 내세운 공식 연기 사유 이면에는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바로 게임의 핵심인 '조작감' 문제다.
올해 글로벌 게임쇼에서 붉은사막을 체험한 다수 미디어와 인플루언서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불편하고 복잡한" 조작 체계였다.
이런 복잡함은 펄어비스의 전작 '검은사막'에 익숙한 하드코어 유저에게는 '손맛'일 수 있지만, 수백만 장 판매를 목표로 하는 글로벌 콘솔 시장에서는 치명적 진입장벽이다.
최근 'P의 거짓'이나 '퍼스트 버서커: 카잔' 같은 성공한 국산 콘솔 게임들이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간 것과 정반대다.
북미, 유럽, 중국 등 지역을 막론하고 "조작에 집중하느라 액션의 재미를 저해한다"는 피드백이 쏟아진 상황에서, 펄어비스는 뒤늦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작감 같은 게임 근간을 수정하는 작업은 게임 밸런스, 애니메이션, UI 등 전반적인 대수술을 요구하며 수개월의 개발 기간이 추가로 필요하다.
결국 2026년 1분기 연기는 '완성도 제고'가 아니라 '상업적 실패 방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검은사막 의존의 함정, 수익 구조의 취약성
붉은사막의 연기가 치명적인 이유는 펄어비스의 극도로 취약한 수익 구조 때문이다.
출시 10년이 넘은 '검은사막' IP가 전체 매출의 78%를 차지하는 위험한 단일 의존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올해 2분기 실적은 이런 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매출 796억원에 영업손실 118억원으로 적자 폭이 1분기 52억원에서 두 배 이상 확대됐다.
검은사막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8.5% 감소한 549억원에 그쳤다.
특히 광고선전비가 전년 동기 대비 43.9% 급증한 105억원을 기록한 것은 상징적이다. 출시되지 않을 게임의 기대감 유지를 위해 막대한 현금을 태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붉은사막이 200만장 이상 판매돼야 개발비 회수가 가능하다고 분석하지만, 현재 Steam 위시리스트 44위라는 초라한 성과는 글로벌 게이머들의 관심도가 생각보다 높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회사 CCP Games의 '이브' IP(242억원)를 더해도 검은사막 매출 감소를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다. 펄어비스는 낡아가는 현금 창출원으로 미완의 신작에 쏟아붓는 위험한 자전거 타기를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CCP Games 매각설이다. 해당 자회사를 매각하려는 움직임은 붉은사막 완성을 위한 현금 확보 목적의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펄어비스는 이제 스스로 만든 거대한 신뢰의 늪에 빠졌다. 7년간 쌓아온 기대감만큼 실망도 컸고, 반복된 약속 파기는 시장의 인내심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2026년 1분기 출시마저 지켜지지 않는다면 회사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게임 개발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신뢰 회복이다. 투명한 소통과 현실적인 일정 관리 없이는 어떤 기술적 성취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펄어비스는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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