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현 기자
wtcloud83@alphabiz.co.kr | 2025-05-30 08:28:08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오는 6월 3일 대선을 앞두고 택배 노동자들의 투표권은 시민사회 압력으로 극적 해결을 맞았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 건설현장 절반은 여전히 선거일 정상 작업에 나선다.
민간기업도 사회적 요구에 응답한 상황에서 공공기관이 오히려 노동자 기본권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며 참정권 보장의 이중잣대 논란이 커지고 있다.
◇ 시민사회 압력에 굴복한 택배업계 vs 뻔뻔한 공공기관
30일 택배업계에 따르면 CJ대한통운과 한진, 롯데글로벌로지스 등 주요 택배사들이 대선일인 6월 3일 휴무를 결정했다.
그동안 배송 경쟁 심화로 '택배 없는 날' 합의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극적 타결이 이뤄진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쿠팡도 주간 배송을 멈춰 주간 기사들에게 투표 참여를 보장했다는 사실이다.
2020년 이후 처음으로 쿠팡이 선거일 휴무에 동참한 것으로, 이는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의 지속적인 압력이 결실을 맺은 결과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 22일 페이스북을 통해 "단 한 명의 국민도 자신의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는데 제약이 없도록 택배 업체 등은 대선일에 대한 휴무일 지정 등 적극적 조치를 모색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고,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정치권도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공공기관인 LH의 행태는 정반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윤종오 무소속 의원실이 LH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285곳 LH 건설현장 중 144곳(약 51%)이 선거 당일에도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LH는 이에 대해 "건설 현장은 오전 7시에 시작해 오후 4~5시면 종료되므로, 이후 충분히 투표할 수 있다"며 별도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선거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한 상황에서 공공기관이 보이는 안일한 태도다.
◇ 공공기관조차 외면하는 기본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같은 공공기관 내에서도 천양지차의 대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소속 현장 62곳 중 44곳(71%)을 휴무로 전환하고, 나머지 현장에 대해서도 투표 시간을 확보하도록 조치했다.
LH와 SH의 이 같은 대조적 행보는 공공기관조차 노동자 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천차만별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특히 LH가 국토교통부 산하 공공기관으로서 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대응은 납득하기 어렵다.
윤종오 의원은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건설노동자의 실질적인 선거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며 "국토교통부가 주무부처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설현장의 특성상 투표소와의 거리, 작업 후 피로도 등을 고려할 때 실질적 투표 참여가 어렵다는 현실도 외면하고 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4~5시까지 고강도 육체노동에 시달린 건설 노동자들이 과연 얼마나 투표소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작 민간 택배업체들이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 휴무를 결정한 상황에서,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이 더 뻔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는 정부가 노동자 참정권 보장을 민간에만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 고용형태로 차별받는 헌법상 기본권 민낯
이번 사태가 더욱 심각한 것은 고용 형태에 따라 헌법상 기본권인 참정권이 차별받고 있다는 점이다.
택배 노동자들은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아 유급휴일이 보장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 제55조 제2항에 따르면, 상시 5인 이상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휴일을 유급으로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이 같은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건설현장 노동자들 역시 일용직 비율이 높고 고용 형태가 복잡해 참정권 행사에 제약을 받는다. 이들 대부분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라 선거일 휴무는 곧 임금 손실을 의미한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된 자'에 한해 선거일 투표 시간을 보장하고 있지만, 특수형태근로종사자나 플랫폼종사자 등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무를 제공하는 자'에게 투표 시간을 보장하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법 개정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당장 이번 대선에서는 사회적 합의와 기업의 자발적 동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 같은 임시방편적 해결책이 얼마나 지속가능한지 의문이라는 점이다. 택배업계의 합의도 사회적 압력에 떠밀린 일회성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 선거에서도 동일한 논란이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공공기관조차 노동자 기본권 보장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민간 부문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다양한 업종에서 여전히 선거일 근무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 노동자 권익 보장의 사각지대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결국 특수고용노동자 등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의 참정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한 이 같은 문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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